「사랑은 타버린 불꽃

사랑은 한 줄기 바람인것을

까맣게 잊으려해도

왜 나는 너를 잊지 못하나

오 내사랑

영원토록 못 잊어 못 잊어.」

유심초의 「사랑이여」가사중에서」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적근산 정상 막사주변 관목에는 새하얀 눈꽃이 덮여 있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남서방향 대성산과 동쪽의 7사단 백암산 산등성이에는 줄기만 남은 검은 나무들과 흰 눈이 어울려 회색빛 세상을 만든다.

오후 들어서 칼 날 같은 바람이 불어와 매서운 추위가 들이 닥친다. 여기는 1200M 격 오지 최전방 화천 적근산 정상. 내일이면 새해 새아침 정월 초하루다. 그날 해질녁 소대장인 나는 소대원들을 막사 바로 아래 취사장 옆 공동 목욕탕으로 모이게 하여 뜨겁게 물을 데워 목욕재계(沐浴齋戒)시키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한시간 이상 열탕에서 몸을 푼 사내들의 얼굴에 빨갛게 화색이 돌고 피부도 뽀해 보인다. 목욕을 끝낸 소대원들을 내무반으로 올려 보낸 후 나도 홀로 뜨거운 탕 속에 몸을 담근다.

막사 밖 출입문 옆에 걸려있는 온도계는 영하 18도를 가리키고, 내무반 출입문 알루미늄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는다. 이런 강추위에 사우나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그 것도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적근산 정상에서. 밖에는 새하얀 눈꽃이 피어 있고 안에서는 펄펄 끓는 열탕 속에서 뻘뻘 땀을 낸 후 나는 차가운 물을 한바가지 퍼 정수리에서부터 서서히 온몸으로 쏟아 붇는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것은 한겨울에 마시는 톡소는 콜라 같은 희열이다. 목욕을 끝내고 내무반에 올라오니 소대원들은 연말 송년 큰 잔치가 한창인 TV 앞에 모여있다.

가요대상 시상식이 끝나고 남녀 인기가수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청백전을 하고 있다. 우리 소대도 TV를 끄고 송년회 준비를 한다. 소대원을 내무반 양쪽으로 앉히고 좌우로 정렬시킨다.

식사당번에게 연말특식으로 나온 통닭을 식판에 담아 소대원 사이사이에 놓게하고 PX에서 사온 됫병 경월소주를 큰 주전자에다 쏟아붇는다. 그리고 소대원 한명 한명에게 프라스틱 물컵을 나누어 주고 주전자에서 소주를 한잔씩 부어주고 건배 준비를 한다,

1분대장 김 하사가 회식 보고를 한다. 「충성! 보병제15사단 제50연대 10중대 1소대, 1981년 송년 회식 준비끝」, 나는 보고를 받는다 「충성! 회식 시작」 그리고 나는 소대장으로서 간단히 송년사 겸 건배사를 한다.

「금년한해 소대원 모두 고생 많았다. 부모님을 떠나와 이제 군문에 바로 들어선 하 이병에서부터 그리고 전역을 한달 남겨둔 박 병장에 이르기 까지 모두 수고 많았다.

지난 한해 우리 소대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삼청교육대원들과 함께한 적근산 진지 벙커작업이 가장 힘들었다. 고된 교육훈련도 힘들었지만 틈틈이 해야하는 작업은 우리모두 체력의 한계를 실험하는 것 같았고 가끔식 삼척교육대원들과의 일촉즉발의 긴장도 극복해야하는 큰 과제였다,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하고 아무 사고 없이 적근산 벙커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소대원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며 나 스스로도 위안하고자한다.

새해에도 우리 소대원 모두가 아무 탈 없이 안전하게 군대생활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우리사단지역으로 북한군의 땅굴이나 무장공비의 침투가 없기를 희망하며 설사 무장공비가 침투하더라도 우리 모두 초천에 박살내 우리 모두의 귀중한 생명을 안전하게 보전하자.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하며, 이 모든 것을 위하여 건배하겠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

술이 한 순배 돌아가고 풍악이 울리고 빼치카옆 빨래들을 걷어들이고 병장들이 나무 화분에 물을 주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곱게 핀 진달래꽃도 한쪽으로 치운다.

모두가 연말 송년 특집에서 부른 조용필의「고추잠자리」를 목청껏 불러제끼고 내무반 바닥이 꺼지도록 흥겹게 몸을 흔들어 군대 춤인 막춤을 춘다. 그리고 윤수일의 「제2의 고향」도 단골메뉴로 불러댄다. 군대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마지막으로 유심초의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꿈처럼 행복했던 사랑이여

머물고 간 바람처럼

기약없이 멀어져 간 내 사랑아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라

지지 않는 사랑의 꽃으로

다시 한 번 내 가슴에

돌아오라 사랑이여 내 사랑아 」

「사랑이여」를 합창으로 송년회를 마무리한다. 취기가 오른 소대원들이 회식을 끝내기 아쉬어 하지만 소대장인 나는 회식을 끝내고 점호를 취하겠다고 선언한다.

밤 11시50분 점호가 끝나고 내무반이 소등하였는데도 소대원들은 회식의 흥분이 채 가라않지 않았는지 중간 중간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차차 소음이 잦아들며 숨소리가 고르다. 모두가 잠이 든 모양이다.

불침번만 내무반을 왔다 갔다 하며 어둠속에 눈동자를 번득거리며 무언가 골똘이 생각에 잠긴다. 그는 편모슬하 홍상병이다. 그는 고향에 두고온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군대 간 자식 생각을, 이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모자 사이는 끈으로 이어져 있고 언제나 이심전심 교신을 한다. 나는 소대원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내무반 바로 옆에 준비되어있는 소대장 침실로 들어선다. 밖은 북풍이 거세 전선줄이 윙윙거리지만 내무반 안은 빼치카의 열기와 사내들의 온기로 아늑하고 포근하다.

다음날 새해 새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기위해 적근산 정상중에서도 최정상에 위치한 포병관측소로 올라간다. 우리 보병 막사와는 약 50M 정도 떨어져있다.

ROTC 동기생인 김중위가 포병관측장교이다. 그런대 이게 웬일 인가. 포병관측소 지하벙커 입구에 새하얀 새끼토끼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올리고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이 추운 겨울날 어미를 잃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내가 다가가자 길 잃은 토끼는 자꾸 지하 통로를 따라 10M 정도 포병관측소 안쪽으로 기어 들어간다. 나는 안전하게 아기토끼를 포획한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벙커 밖으로 나와 거센 북풍과 마주한다. 이윽고 일출이 시작된다. 나는 아기토끼를 양손에 들고 적근산 정상에서 해를 향해 친구인 김중위와 함께 새해 소망을 빌며 살며시 아기토끼를 놓아준다. 아기토끼는 뒤 돌아 보지 않고 눈밭을 사뿐 사뿐 뛰어간다.

틀림없이 어미를 찾아 갔으리라 찾아 갔으리라 』